임진왜란 이후 조선
-많은 백성이 죽고 농민들의 생활 터전이 황폐화됨
-경복궁을 비롯한 주요 문화재들이 불타고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일본에 많이 빼앗김
-일본은 조선의 도자기공과 유학자를 데려가 문화가 발달함
도자기의 신 이삼평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 중 대표적인 사람
일본 도자기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있음
이삼평을 기리는 비
광해군의 노력
토지와 인구를 조사-세금을 거둠
나라의 재정을 늘림
민심을 모으고 나라를 안정시킴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궁궐을 고치거나 새로 지음
허준을 시켜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함
만주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해 후금을 세움
후금의 세력 확장과 명나라
후금이 명나라를 침입-명나라는 조선에 지원을 요청-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펼침(세력이 커지는 후금과 싸울수도
임진왜란 때 도움을 준 명나라를 도와줄 수도 없는 상황)-광해군이 명나라에 강홍립 1만여 군사를 보내며 전쟁 상황을
보면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하게 대처하도록 시킴. 명나라가 패하자 강홍립은 싸우지 않고 후금에 항복해서 전쟁을 피함
양수투항도(강홍립이 후금에게 항복하는 장면)
명나라와의 신의를 저버리고 중립외교를 한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신하들이
광해군을 내쫓고 새로운 왕(인조)을 세움(인조반정).- 인조는 광해군과 다른 외교방식을 펼침
(친명배금 정책: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후금은 멀리함)-1627년 후금은 쫓겨난 광해군의 복수를
대신한다는 핑계로 조선을 공격함(정묘호란. 1627년)-명나라와도 싸우고 있던 후금이 화해를 요청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후금과 형제의 나라가 되기로 함-정묘호란이 마무리되자 조선은
후금과의 약속을 어기고 다시 명나라와 계속 사이좋게 지냄(후금을 오랑캐라 여기고 얕잡아 봄)
-후금은 세력을 더 키워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게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요구함
-조선은 청을 임금의 나라로 인정할 생각이 없었음-1636년 청나라 태종이 1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함(병자호란)-인조는 임시 수도 역할을 했던 남한산성으로 피신
-45일 만에 청나라에 항복-청나라가 진을 치고 있던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함
-인조의 두 아들(봉림대군과 소현세자)이 인질로 끌려감
삼전도비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은 곳에 그 공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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